두 줄 요약
짜장면은 중국음식이지만 가장 한국적인 현지화 된 음식이다. 양념은 다소 다르고 색도 다르지만 가장 근접한 음식이 작장면이다. 炸醬麵(자쟝몐)은 면장에 간을 하여 볶은 뒤 밀면 위에 얹어먹는 요리의 역사를 찾아본다.
짜장면 과 화교의 역사
짜장면의 유래는 화교의 생존전략 과 맞물려 있다. 짜장면의 기원은 구한말 중국에서 온 화교들에 의해 소개된 작장면이다. 작장면 지금과는 다르게 기름기가 많고 춘장의 맛이 지금처럼 진하지 않았다. 기름기가 많았던 이유는 돼지기름으로 춘장을 볶았기 때문이다. 작장면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짜장면이 되었을까?
짜장면을 탄생하게 한국의 화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짜장면의 주역인 화교들과 짜장면의 역사를 찾아보자. 짜장면과 화교역사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약 1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조선에서 구식 군인들에 의한 임오군란이 발생한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청나라 군대를 따라 산둥성 출신 청나라 상인 40여 명이, 함께 조선에 들어오는데 이들이 근대 한국 화교의 기원이 된다.
조선에서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나라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화교들의 상권과 자본이 조선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무역업에 종사 하면서 지금의 인천 제물포의 터를 잡은 그들이 가져온,
중국 가정식 면 요리가 바로 작장면이고 한국 짜장면의 기원이다. 1884년 인천의 청나라 조계지(租界地)가 생겨났고 무역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요리점(청요리 전문점)이 생겨났다.
인천 부두의 노포에서 팔던 작장면은 저렴한 가격과 간편함으로 인해, 인천 부두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인들에게 짜장면은 호떡이나 호빵 같은 이방인의 음식이었다. 조선에서 청나라의 입지가 약화되는 등 여러 정치적 변동이 있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화교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화교 자본도 여러 직종으로 다양화되며 계속 성장해 간다. 특히 화교들의 청요리점을 중심으로 요식업이 크게 성장했다.
통상조약이 체결 되면서 화교유입의 길이 터지면서, 인천공원(구 자유공원) 인근 북성동 일대 5,000여평 부지에 화교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이 곳을 청관거리라 하였고, 그들의 고급음식을 청요리라고 했다.

국내 최초로 1905년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간판을 걸고 처음으로 영업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 후 1912년 “공화국의 밝아오는 아침”이라는 뜻의 공화춘(共和春)이란 상호를 내 걸었다. 그 이후 80여년을 서민들의 애환과 고급 요리 로서 공화춘의 명성을 유지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도 요식업 무역업 등에서 계속 성장하던 한국 화교들은 한 차례 위기를 맞이한다. 숙련도와 임금 면에서 화교 노동자들은 조선인 노동자 들 보다 경쟁력에서 앞섰는데, 이 때문에 조선인들은 화교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화교 자본을 견제 하려던 일제와 언론이 조선과 중국의 갈등을 이기게 되면서, 들끓던 반중 감정은 여러 차례 화교 배척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이때 화교사에는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 나아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으로 화교들의 무역업은 위축되었고 일제가 실시한 식료 배급제로 인해 짜장면과 같은 중화요리를 만드는 밀가루 공급이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교들의 경제력은 굳건히 버틸 수 있었다. 그동안 구축해온 유통망과 판매망 덕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화교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광복이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으나, 해방 이후 전쟁까지 겪은 한국은 혼란하고 매우 가난했다. 화교들은 전체 무역량의 82%를 장악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고 중국의 공산화로, 고향으로 돌아갈 길도 막혔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화교 인구와 경제력은 나날이 커져 갔다. 한국 정부는 나라를 재건하고 국내 산업을 육성 하려 했기 때문에, 화교 자본의 이러한 성장은 큰 장애물이었다. 결국 이는 한국 정부의 화교 자본 억제로 이어졌고 화교들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화교 자본의 창고업 무역업을 억제 했으며 1960년대 초반 군사정부는, 화폐 개혁과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을 통해 대다수 화교 경제권에 치명 타를 안겼다. 정부의 이러한 정책으로 화교들은 장사 하기가 힘 힘들어졌고 인천과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한 차이나타운 경제권은 쇠퇴하기 특히 명동 차이나타운은 재개발로 인해 거의 사라지게 되어 대다수의 화교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살기 힘든 한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억제 정책으로 위기의 시대를 겪었던 화교와 짜장면시장은 더 발전하고 넓어졌다. 지금의 기준으로도 짜장면은 쉽게 접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별미이다. 그러던 와중에 1990년대가 되면서 한국 화교 사회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한중 수교와 한국의 외환위기 사태가 기점이었다.
그 시작은 1992년에 체결된 한중수교였다. 1997년 외환 나뉘기 이후에는 화교들의 토지 소유도 가능해져 화교 자본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화교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있다. 화교들의 공동체 역시 21세기를 맞이한 이후 다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 중화요리의 유행에 크게 기여 하였는데 중국집 수 또한 기하 급수 적으로 증가해 왔다.
짜장면의 시장 성공 요인
짜장면은 어떤 비결로 대중화되어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첫 번째는 춘장
춘장은 짜장면의 맛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재료이다. 화교와 짜장면이 처음 들어왔을 때 춘장의 맛은 지금처럼 일정하지 않았다. 새로 볶을 때마다 맛이 달라 때문에 예전엔 짜장면에 대해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
화교들은 어떻게 하면 짜장면의 맛을 획일 화하고 보다 대중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1948년에 왕송산이라는 화교가 춘장을 고안해 내었는데 이 춘장은 짜장면의 맛과 인기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춘장을 매번 볶을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게 맛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모든 중화요리점이 왕송산의 춘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맛보는 지금의 짜장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두 번째는 혼 분식 장려운동
한국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은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한국인의 주식이었던 쌀 생산은 어려움에 처해 식량은 특히 부족했다. 그러던 중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밀가루 원조가 들어오자 한국 정부는 이를 식량난 해소에 사용하기 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훈분식 장려운동을 정책적으로 추진했고 분에 밀가루를 원료로 하는 면 요리 제빵 산업이 성장하게 된다. 짜장면도 이 정책으로 영향을 받아 평균 가격이 내려가고 물가지표 변화의 기준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중국집과 짜장면은 본격적으로 서민들에게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세 번째는 배달 문화
배달 문화가 그만큼 익숙한 한국 사람들에게 짜장면은 대표적인 배달 음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신속 배달이 적힌 철가방을 들고 배달하는 배달원의 모습은 가히 현대 한국 배달 음식 계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짜장면이 점차 배달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짜장면의 대중화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일이나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에는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점점 대중들과 함께한 짜장면은 이제 언제 어디서나 쉽게 시켜 먹을 수 있는 배달 문화를 만들어냈다.
짜장면 면발 이 노란색인 이유

중화면의 면이 노란 이유? 그 비밀은 면소다입니다. 면소다는 중탄산나트륨의 일종입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소금덩어리 같기도 하고 얼음 덩어리 같기도 하다. 중탄산나트륨 전문용어보다는 두부 만들 때 넣는 간수라고 보면 쉽다. 소금을 추출하고 난 염기성 용액이 바로 간수 이다.
밀가루반죽에 염기성 물질이 첨가 되면 글루텐 구조가 확장 된다. 반죽이 찰지고 면의 식감이 쫄깃해 진다. 밀가루에 글루텐단백질이 서로 엉키면서 탄성과 점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중식면이 수타를 하는 과정에서 밀가루가 쭉쭉 늘어나는 것도 면소다의 숨은 비밀 이기도 하다. 간수의 효과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밀가루에는 플라보노이드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 염기성 물질이 결합되면 노란색의 색소성분으로 변한다. 라면 면발이 노란색이 나는 이유도 동일하다. 요즘은 리보플라빈이라고도 불리는 비타민 B2를 첨가해 영양을 강화 하면서도, 면 또한 더 먹음직한 노란색으로 만드는 경우도 많다.
리보플라빈은 밀가루의 색감을 더욱 좋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평소 섭취가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의 영양 강화 효과도 있다. 색도 좋아지고, 영양도 보강하는 일석이조의 효과이다.
짜장라면 시장규모
짜장면의 대중인기는 인스턴트 짜장라면 시장도 판도가 바뀌었다. 39세 짜파게티는 국내 단일 브랜드 사상 처음으로 2010년 1000 억원을 돌파했다. 2018년 1500억원, 2020년엔 2190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짜장라면 시장 규모는 2018년 2000억원 수준에서 2020년 3000억원대로 증가했다.
국내 인스턴트 짜장라면의 대표 짜파게티의 시장점유율은 85%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마무리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 시인
거의 외식을 안 하며 자연 건강식 위주로 직접 해 먹는 나도 가끔 짜장면이 먹고 싶다. 날씨가 꾸물 거리며 질척한 비오는 날 이라던가, 기분이 우울하고 불편한 날 이라던가 특히 이사하는 날, 그런 날이면 짜장면이 먹고 싶어진다.
짜장면 한 그릇 기분 좋게 비우고 나면 어머니를 만나 함께 식사를 한 거 같은 푸근함이 다가온다. 짜장면은 그런 음식이다.